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 동요 <오빠 생각>
한 달에 한 번씩 ㅅㅇ유치원으로 숲놀이하러 가고 있다.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OO산 숲놀이'라는데, 유치원 뒷문으로 나오면 바로 숲이 있었다. 유치원 아이들은 월요일마다 이 숲에 나와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숲유치원이 아닌데도 동네 숲에서 산책할 수 있다니! 서울 한복판에서 숲을 누리는 이 아이들이 좀 더 깊은 숲을 만날 수 있게 도울 생각에 기뻤다.
내가 맡은 햇살반, 꽃잎반은 만 4세, 여섯 살 반이다. 꽃과 새, 애벌레, 잎, 열매, 나무 등을 다달이 다른 주제로 만나는데, 9월 주제는 '가을 곤충'이었다. 숲에 직접 나오는 만큼 실제 살아있는 곤충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곤충은 잎이나 열매 같은 자연물과 다르게 각자 하나씩 보기는 어려웠다.곤충 자체보다는 먹이나 흔적을 보면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겠다 생각했다.
한 가지 곤충으로 그날 수업을 이끌고 싶었다. 가을 곤충 가운데 어떤 하나를 골라야 할지 몰라서 <곤충 도감>을 꺼냈다.
각종 곤충 그림이 가득 채운 표지
가을이 오면 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서늘해진다. 곡식이 여물고 과일이 익는다.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다가도 한낮에는 더워져서 일교차가 10도를 넘기도 한다. 풀밭에서는 왕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린다. (...) 사마귀는 풀 줄기에 거꾸로 매달려 거품에 싸인 알을 낳는다. 모두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는 것이다. 세밀화로 그린 보리 큰도감 <곤충도감> 25쪽
도입부 가을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소개된 곤충은 '왕귀뚜라미'였다. 귀뚜라미는 시나 노래 가사에서도 보이고, 보일러 이름에도 있어서 친숙한데 '왕귀뚜라미'는 처음 들어보았다. 왕귀뚜라미는 귀뚜라미의 한 종류인건가? 귀뚜라미랑 왕귀뚜라미가 다른 건가? 학생으로 돌아간 듯 설레는 마음으로 도감 차례를 펼쳐보았다.
왕귀뚜라미는 여치, 방아깨비와 함께 메뚜기목에 속해있었다.
메뚜기목 귀뚜라미과 학명은 Teleogryllus emma
귀뚜리, 기또래미, 귀엽다!
이름을 살피고 옆장에 세밀화를 보는데 광교산에서 아이들과 봤던 그 곤충이었다! 아이들과 '왕뚜기'라고 따로 이름 만들어서 불렀는데 진짜 '왕'귀뚜라미였다. 이름을 짓기 위해 자세히 들여다보았던 터라 그림을 보고 바로 기억이 났다. 직접 만났던 곤충이니까 유치원 아이들에게도 생생하게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겠다 싶어 자신감이 생겼다.
광교산에서 본 왕귀뚜라미
왕귀뚜라미는 가을밤에 풀섶이나 집 둘레에서 "뜨으르르르" 하고 운다. 앞날개 두 장을 서로 비벼서 소리를 낸다. 소리는 수컷만 내는데 암컷을 불러 짝짓기를 하려는 것이다. (...) 암컷은 앞다리에 있는 귀로 소리를 듣고 수컷을 찾아간다. - 세밀화로 그린 보리 큰도감 <곤충도감> 80쪽
울음소리로 가을을 알리는 곤충답게 가장 먼저 소리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었다. 생김새, 사는 곳, 한살이 등을 찬찬히 읽어보고나니 왕귀뚜라미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세밀화를 들여다보았다. 정말 머리가 둥글고 단단해보였다.
그림 ⓒ권혁도
다행히 유치원 뒷산에도 왕귀뚜라미는 울고 있었다. 아이들과 숲길을 걸으며 왕귀뚜라미 소리를 듣고, 귀뚤귀뚤 소리를 흉내내며 누가 왕귀뚜라미인지 맞춰보며 놀았다. 앞날개를 비벼서 소리내는 왕귀뚜라미처럼 팔을 비벼보기도 했다. 가을을 알리는 왕귀뚜라미 이야기로 마무리하며 앞으로 아이들이 만나갈 가을에 왕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길 바랐다.
유치원 수업 시간은 한 시간 반, 만 3세와 만 5세 반까지 여러 반이 동시에 숲에 나오다보니 공간도 제한되어 있다. 숲학교에서 두 시간 동안 여덟 명이랑 드넓은 산을 누비다가, 한 시간 반동안 스무 명을 데리고 숲에 있으니 깊은 숲을 만나게 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광교산에서 만난 왕귀뚜라미와 도감 덕분에 아이들에게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었다. 햇살받은 꽃잎처럼 반짝이는 스물한 명의 천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누리 선생님이랑 숲에서 노는 게 제일 좋아요."
왕귀뚜라미를 알게 된 이후로 울음 소리가 더 잘 들린다. 9월이 다 지나고 서리가 내리는 절기 상강(霜降)인 오늘까지도 왕귀뚜라미는 계속 울었다. 도감에 적힌대로 정말 11월 입동이 오기까지 가을밤을 노래할까 궁금하다.
경아 친구 주영이었다. 주영은 나도 잘 아는 애였다. 경아랑 안방을 같이 쓰다 보니 통화를 하면 상대방이 누구인지,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있다.주영이 말했다.
"낮에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는데, 재료가 많이 남았거든. 내일 너네 집에서 파스타 해 먹자고.“
경아가 반가워하며 말했다.
"그래!“
전화를 끊고, 경아는 내게 주영이 집에 와도 되는지 물어봤다. 통화 내용을 못 들은 척하며 그러자고 했다.
이튿날 아침이 밝고 우리는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청소를 하고 식탁 위에 꽃병도 바꿨다. 열두 시쯤, 벨소리가 울렸다. 주영이 묵직한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가방 안에는 양송이, 파프리카, 방울토마토, 어린 잎채소 등이 있었다. 두 사람이 부엌에서 요리하는 동안 나는 마실 거리와 피클로 식탁을 차렸다.
구운 바게트와 파스타, 리조또, 에이드까지 풍성하게 차려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었다. 잘 얻어먹었으니 설거지는 내가 하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러 나갔다. 설거지를 마치고 싱크대 거름망을 보았다. 양파, 마늘 껍질, 파프리카 씨, 방울토마토 꼭지, 시든 어린잎, 먹다 남은 피클, 에이드에 넣었던 애플민트 잎, 짧은 면 몇 가닥이 보였다. 거름망에 있는 것들을 꺼내 물기를 빼고 통에 담았다. 그리고 삽과 미생물 분무기를 들고 일층으로 내려갔다.
집 밖에는 화분이 여러 개 있는데 가장 작은 게 우리 거다. 다른 화분에는 대파, 상추가 자라고 있지만 우리 것은 무얼 키우기 위한 화분이 아니었다. 음식물 버리기가 아까워 만든 거름 화분이었다. 쓰레기봉투에 버릴 때는 벌레 없이 꽉꽉 채우기 위해 음식물을 냉동실에 얼렸다. 거름 화분을 만든 뒤로는 바로바로 버렸다.
가져간 음식물을 넣으려고 모종삽으로 흙을 팠다. 흙 속에는 까만 집게벌레가 기어 다니고, 하얀 구더기도 몇 마리 꿈틀거렸다. 날파리가 팔이며 얼굴로 날라들었고 이상한 냄새도 났다. 지난주까지 개미 한 마리 없었는데 날이 더워져서 그런가 하고 삽으로 더 쑤셔 보았다. 안쪽에 썩어가는 고기에서 구더기가 나왔다. 경아 생일에 미역국 끓이고 남은 소고기였다. 채소나 과일 껍질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거의 썩었는데 고기는 버릴 때 덩어리 그대로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음식물을 넣으면 벌레가 더 생길 것 같았다. 찌푸린 얼굴로 살충제 스프레이를 뿌리듯 미생물 발효액을 뿌렸다. 가지고 내려갔던 음식물을 들고 계단을 올랐다. ‘이웃집 사람들이 싫어하면 어떡하지, 경아가 그만두라고 하면 어쩌지, 흙이 묻은 채로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담아도 되나, 씻어서 담아야 하나, 벌레들도 같이?’ 고작 한 층으로 올라오는 사이에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집에 들어와 밀폐용기에 음식물을 넣고 손을 씻었다. 그리고 노트북을 켜고 검색창에 ‘친환경 거름’, ‘음식물 구더기’를 쳤다. 인터넷 기사나 블로그, 카페 글을 읽어보니 거름 만드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흙을 뒤적여 주고, 마른 풀이나 낙엽을 넣어서 수분을 조절해 줄 필요가 있었다. 나 같이 시행착오를 겪은 분들이 많아서 위로가 됐다.
그리고 고기는 거름으로 만들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됐다. 분해하는 데 오래 걸릴뿐더러 썩을 때 냄새가 고약하고 벌레가 잘 꼬이기 때문이었다. 또, 구더기는 굉장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이 먹보들은 엄청난 양의 음식을 해치울 수 있는데, 일 킬로그램 구더기가 네 시간 동안 먹을 수 있는 폐기물이 이 킬로그램이나 된다. 구더기가 생기는 건 마냥 싫어할 일이 아니었다.
빈 통과 삽을 들고 다시 내려갔다. 삽으로 흙을 뒤적여 썩은 소고기 덩어리를 찾았다. 덩어리 안에서 구더기 한 마리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구더기가 지나간 더러운 자리가 깨끗해진다는 걸 알고 나니 징그럽지 않았다. 구더기는 흙에 넣어주고 고기 덩어리만 건져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줄여보겠다고, 비닐봉투 덜 쓰겠다고 시작한 일이었다. 대부분 유기농으로 산 것들이라 거름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몸은 좀 귀찮을지언정 마음은 즐거웠다. 베란다 텃밭에 직접 만든 거름을 넣어줄 생각에 신나 있었다. 그런데 책에 나와 있는 것처럼 거름이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냄새 많이 나면 어쩌지. 구더기가 커서 파리 되면 어쩐다.’ 나 좋자고 다른 사람한테 피해주게 될까봐 주눅이 들었다.
그렇다고 베란다에 가져오면 경아가 싫어할 테니 밖에 두고 며칠 더 지켜보았다. 이전까지 음식물을 넣고 방치했다면 이번엔 신경 써서 물기를 조절해주었다. 공터에 가서 마른 풀을 가져왔다. 벌레가 늘어나지 않길 바라며 화분 안에 넣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씩 흙을 뒤적여줬다.
며칠 지나니 확실히 냄새도 덜 나고 벌레도 줄었다. 변산공동체 살 때도 음식물이랑 똥으로 거름을 만들기는 했지만 갖다 붓기만 할 뿐 어떻게 거름이 되는 건지 관심 가지지 않았다. 관심 없어도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직접 망해보니 궁금한 점이 생기고, 구더기랑 지렁이, 미생물, 발효 공부도 하게 됐다. 노지에 가꾸는 밭이 있었다면 쌀뜨물이나 달걀 껍데기, 오줌으로 액비도 만들 기세였다. 상추와 고추뿐인 상자 텃밭에는 지금 있는 거름도 많으니 참기로 했다.
거름 만들면서 겪었던 시행착오를 나눌 수 있는 이웃이 가까이 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이웃이 지렁이 분양해주고, 내가 미생물을 나눠주면 좋을 것 같다. 길가에 화분 놓고 상추나 고추, 토마토를 키우는 동네 할머니들께 혹시 음식물 모으시는지, 지렁이 키우시는지 여쭤봐야겠다. ‘나중에 좋은 거름 만들어서 드리겠다고, 지렁이 수 늘려서 다시 갚겠다고 하면 좋아하시려나.’ 벌써부터 기대만 앞선다. 먼저 경아랑 거름 화분부터 친하게 해주고 볼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