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녹색 암막 커튼 사이를 비집고 햇볕이 새어 들어왔다. 아홉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불을 갠 뒤 옷을 갈아입고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었다. 4월치고는 제법 매서운 찬바람이 불어왔다. 상자 텃밭에 있는 상추와 고추가 추울까 걱정되었다. 이윽고 싱그럽게 반짝이는 초록빛을 보았다. 꼭 웃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텃밭 흙을 만져보았다. 비가 오고 난 뒤로 물을 주지 않았는데도 아직 촉촉했다. 부드러운 흙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변산이 떠올랐다. 날마다 흙을 만지며 사계절을 몸으로 느끼던 곳이었다. 전라북도 부안에 있는 변산은 서울에서 오가기엔 꽤 먼 곳이었다. 서울에 있는 친구들은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였고, 집에 인터넷도 없던 터라 연락도 자주 못했다.
친구들이 보고 싶을 때면 편지를 보내곤 했다. 그 당시 편지에 자주 쓰던 멘트가 있었다. 주련이에게 편지를 쓰던 이 년 전에도 여느 때처럼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회색빛이던 내가 알록달록한 네 덕분에 밝고 환하게 웃는다. 밋밋한 나랑 친구해줘서 고마워.' 말주변이 없고 무뚝뚝한 나에 비해 다정하게 재치 있는 주련이가 부러웠던 참이었다.
편지를 보내고 난 일주일 뒤 주련이에게서 답장이 왔다. 시간이 흐른 지금, 뭐라고 적혀 있었는지 대부분 까먹었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다. '유쟝은 회색빛이 아니라 나무 빛이야. 굵고 단단한 나무 기둥 같은! 그건 나무뿌리인가? ㅋㅋ' 역시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챙길 줄 아는 친구였다.
주련이가 보는 나는 회색보다 고동색에 더 가까웠나보다. 듣고 보니 고동색도 꽤나 무뚝뚝한 면이 있었다. 회색보다는 좀 더 우직한 느낌이었다. 나름대로 고집 있고, 뚝심 있는 나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 나무를 볼 때마다 반갑다. 특히 나무줄기를 보면서 주련이가 해준 말을 떠올린다.
스스로를 사랑해주기 어려울 때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해주는 사랑을 받는 것도 큰 힘이 된다. 여전히 자기 색깔로 선명하게 반짝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부럽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초라해지지는 않는다. 촉촉한 흙빛, 건강한 똥빛, 오래된 구리와 같은 고동(古銅)빛을 닮은 내가 마음에 든다.